시인의 마음

[스크랩]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수성하와이. 2010. 3. 31. 00:18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히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             03-22

이제 날이 밝으면 네팔을 거쳐 인도로 갑니다.

해마다 겨울을 인도에서 지냈는데

법정 스님께서 병중이셨던 지난겨울은

서귀포를 오가며 보냈습니다.

이제 스님은 떠나시고 저도 떠납니다.

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니르바나에 계실까요,

아니면 단순히 저 반대편에 가 있을까요?  

슬픔을 함께해 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슬픔들을 갠지스강에 띄워 보내고

스님 49재에 맞춰 돌아오겠습니다.

그후에 스님의 유지와 책 절판에 관해

제가 알고 있는 일들을 밝히겠습니다.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글쓴이 : 淸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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