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얽힌 전설들

인왕산 치마바위

수성하와이. 2011. 5. 22. 21:11

 


서울의 서쪽에 해당하는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무악동, 홍제동, 부암동에

 

걸쳐 있는 인왕산(338m)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이라 지칭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본래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 한다.

 

인왕산하면 호랑이이야기를 뺄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인왕산은 호랑이의 횡행으로 난동이 끊이지 않았다.

 

경복궁 내정이나 창덕궁 후원에까지 내려와 소란을 피우고

 

고양 등지의 민가에까지 침입하여 그 피해인원이 수백 명에 달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잡이에 나설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도‘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호랑이가 활기를 치고 다녔던 곳이라 산의 형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좌청롱 우백호를 이루는 보기 드문 명당으로 청와대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청와대를 비호한다는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지난 1993년부터 출입이 허가되어 아침·저녁으로 생수통을 들고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산 속으로 들어가면 기묘한 바위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인왕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진 치마바위가 눈에 띈다.

 

구불구불 주름잡힌 치마를 연상케 하는 이 바위에는

 

중종 때의 폐비 신씨와 관련한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의 일이다.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신씨왕비를 몰아내고 인왕산계곡으로 내쫓았다.

 

폐비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정적이라는 이유로

 

그 딸 역시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뜻에서다.

 

당시 신씨의 나이는 겨우 스무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세살 어린 나이에 진성대군의 아내가 되어

 

7년 만에 폐비가 되었으니 그 여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깊었겠는가.



왕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갑작스런 폐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막하기만 하였다.

 

상궁 곁에서 치마 자락 이끌며 곱게 자라고 보니 반항도 받아들임도 벅차기만 하였다.



신씨는 먹을 것, 잠자는 것을 잊은 채로 멍하게 궁을 내려다보며

 

중종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갔다.



한편 경회루에서는 중종도 신씨와 똑같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중종은 인왕산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고 인왕산을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신씨에 대한 연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무친 그리움 속에 신씨는 나날이 야위어갔다.

 

안간힘을 다해 중종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

 

저 아래 경회루는 한없이 고요하였다.

 

신씨는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치마를 벗어 바위에 걸쳐놓는 것으로

 

“신첩이 여기 있사옵니다. 아직 전하를 잊지 못하옵니다.”라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신씨의 사무친 마음은 끝내 경회루에 닿지 않았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인왕산을 찾는 이들에게 새롭게 읽혀지고 있다.



인왕산 정상에 서면 경복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고층건물 하나 없던 그 시절에는 신씨가 전한 사랑의 신호가 전해졌을 것도 같은데

 

당시 중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중종은 첫사랑 신씨가 폐위된 뒤 두 명의 왕비를 맞고서도

 

첫 부인에 대한 연정을 잊지 못했다 하니 신씨의 간절한 마음만은 전해졌던 것 같다.